세상을 뒤흔든 악덕 트레이더들, 공통 유전자는
전세계 1월 증시가 흉흉한 조정을 보인 가운데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주말판(24~25일) 특집으로 악덕 트레이더(Rogue, 금융 사기꾼)들을 한데 모았다. 특집 제목도 '로그 갤러리'로 뽑았다.
여기에는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시에떼제네럴(SG)의 하급 트레이더였던 제롬 케르비엘부터 일본 스미토모 상사의 동(銅) 거래인이었던 하마나카 야스오에 이르기까지 5명의 사기꾼들이 등장한다.
최신판 사기 행각의 대명사가 된 케르비엘의 경우 수년간 휴가를 쓰지도 않았고, 주말에도 나와 일을 할 정도였다. 소수의 친구만 둔 그는 직장 동료들에게는 친절했다. 회사 내부 감시 체계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그는 은행 자본의 2배에 이르는 500억유로에 달하는 포지션을 취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은행은 49억유로(사고 당시 72억달러)라는 역사상 최대의 손실을 입게 된다. FT는 사기꾼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관리 소홀, 성과주의 중심의 은행 시스템이 대형 사기 사건을 가져오는 주요 이유라고 지적했다.
1. 제롬 케르비엘
지난해 1월24일 SG는 제롬 케르비엘이라는 트레이더가 회사 규정을 위반하며 파생상품을 운용, 49억유로의 손실을 입었다고 공개했다. 유럽 대륙이 놀랐다. 미국도 바짝 긴장했다. 케르비엘의 포지션 정리 과정에서 세계 증시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입사 7년차였던 케르비엘은 선물 파생상품 담당 부서에서 유럽 주가지수선물을 거래해왔다. 컴플라이언스와 사내 통제 시스템을 잘 아는 그는 회사의 감시를 피해 상상불허의 매매를 해오다 큰 일을 냈다.
케르비엘 자신의 이익을 위한 포지션은 없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같은 대규모 사기를 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불법 거래 초기에는 한때 14억 유로 상당의 평가이익을 얻기도 했다. 이익을 줄이려 '오버'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그는 "한 트레이더가 매매를 잘한다면 곧장 규모의 개념을 잃게된다. 포지션을 정리하는 게 쉽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케르비엘 편이다. 7명중 한 명만 케르비엘을 욕한다. 나머지는 회사의 허술한 관리를 탓한다. 그러나 법적 처벌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작은 IT 컨설턴트 일을 하고 있다.
2. 닉 리슨
1995년9월 베어링은행이 단 1달러에 매각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사고 이후 리슨은 싱가포르에서 4년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결장암으로 형량이 줄었다. 징역을 산 첫번째 악덕 트레이더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99년 감옥에서 나와서는 순탄한 삶을 살고 있다. 자서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 아일랜드의 캘웨이에 살며 지방의 풋볼 클럽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
20여년전 그는 베어링은행의 싱가포르 지점 트레이더로 일했다. 닛케이225 지수선물에 투자하면서 점점 손실을 불려 결국 은행을 파산에 이르게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그의 주특기는 차익거래.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가격이 다르게 형성된 주식에 대해 싼 것을 사고 비싼 것을 파는 식의 차익거래를 했다. 초기에는 그 역시 매매를 잘했다. 90년대 초에는 은행 전체 이익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28살의 이 젊은이는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본사는 그의 보고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지 않았다.
큰 사고의 출발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매매 실수를 감추기 위해 은밀한 계좌를 하나 만들었는데, 회사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을 금새 깨달은 것이다. 계좌 이름은 '8888'. 손실을 입은 거래는 이 계좌로 옮겨 은폐했다. 큰 수익이 나면 한꺼번에 만회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갔다. 92년말 손실금액은 200만파운드, 93년에는 2300만팔운드, 일년후에는 2억800만파운드로 불어났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더 없이 위험한 거래를 하다 손실이 더 빠르게 불어난 것이다. 95년1월17일 고베지진은 그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95년2월 리슨은 쿠알라룸푸르로 도피했고, 이때 손실은 8억2700만파운드였다. 18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채권 투자 손실로 영란은행(BOE)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베어링은 보수적인 경영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리슨의 사기 이후 1달러에 네덜란드 ING로 매각됐다.
3. 이구치 토시히데
리슨의 사기행각이 채 가시지 않았던 95년7월13일 다이와은행 뉴욕지점의 부지점장인 이구치는 상사에게 3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10여년에 걸쳐 자신이 저지른 정교한 사기 매매 내용이 담겨있었다. 회사의 감독 체계를 너무나 잘 알던 이구치는 오랜기간 자신의 손실을 은폐하며 매매를 할 수 있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으로, 자유롭게 매매를 하던 그는 11년에 걸쳐 3만건에 이르는 매매 조작을 기록했다.
손실 대부분은 국채 거래였다. 리슨과 마찬가지 그는 백오피스에서 출발해 매매 부서로 승진한 케이스였다. 백오피스는 보수가 형편없다. 그래서 하루빨리 여길 벗어나길 원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구치는 한때 뉴욕지점 수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누구도 이구치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를 잘 아는 이구치는 손실이 발생할 때마다 다이와나 고객 계좌에 있는 채권을 매각했고, 적법한 매매로 돌리기 위해 손실을 위조했다. 사기가 드러날까봐 휴일에도 나와 자리를 지켰다.
그의 손실 규모는 11억달러. 다이와는 사고를 은폐했으나 감독당국에 의해 사기가 적발됐고,이구치는 은행 자금 유용, 회계 조작, 자금 세탁으로 4년의 징역형과 260만달러의 벌금에 처해졌다. 다이와는 사고 직후 미국에서 철수했다. 이구치는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베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4.하마나카 야스오
케르비엘과 리슨, 이구치는 사고 전에는 일반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범죄 이후 유명세를 탔다. 하마나카는 다르다. 스미토모 상사의 동(銅) 거래 책임자로 일했던 그는 'Mr. 5퍼센트'로 불렸다. 세계 구리 시장의 5%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거래를 하고 시장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뜻하는 별명이었다.
사들이는 양이 너무 많아 수급 불균형을 가져오고 가격 상승을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런던에 깔아둔 네트워크 등을 활용하며 구리의 제한된 공급량을 공개하며 이익을 취했다. 필요에 의해 구리를 사야했던 사람들은 구리 가격 상승으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구리 가격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손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 보다 그는 은폐를 선택했다. 구리 가격이 오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퀀텀펀드와 타이거 펀드 등이 가세해 구리 가격 하락에 베팅하기도 했다. 대규모 조작에도 불구하고 구리 가격은 하락했고 손실은 26억달러에 달했다.
하마나카의 포지션이 정리되면서 구리 가격은 추가로 급락했다. 이는 사기꾼의 포지션 정리로 가격이 변할 수 있음을 뒷받침한 최초의 증거였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내고 있던 일본에게는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그는 8년형을 살고 2005년에 감옥을 나왔다.
5. 존 루스낙
한동안 뜸하던 대형 금융 사기 사건은 2002월2월 존 루스낙에 의해 재발됐다. 그는 얼라이드 아이리시 은행(Allied Irish Banks)의 외환 트레이더였다. 그의 사기 매매는 정교하지도 그렇다고 대담하지도 않았다. 동료들은 연봉 8만5000달러의 평범한 외화 트레이더라고 평가했다. 두명의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다니는 모기지 주택에 사는 범부였다.
그런 그가 엔화 매입 등으로 손실을 보기 시작했고, 이를 허위 계좌를 통해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루스낙은 급기야 2002년 75억달러에 달하는 베팅을 하게되는데 이는 그의 한도를 3000배 초과하는 규모였다.
뜨거운 법적 공방 끝에 루스낙은 구속됐고, 7년반의 수감을 거쳐 내년 석방될 예정이다.
FT는 훌륭한 트레이더는 훈련이 잘 돼 있고, 창조적이며 용감하다는 특징이 있다며 이들은 도전적이고 때론 감독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같은 특징은 로그 트레이더들에게도 예외없이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흉흉한 금융위기가 가시지 않는 지금, 성과주의만을 강조하는 은행 풍토가 바뀌지 않는한 제2, 3의 리슨과 케르비엘은 소리없이 잉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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