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쓴다는 것은 '정확하고 쉽고 짧게' 쓴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서도 정확성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품위 있는 낱말의 선택'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어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韓國語=70%의 漢字語+30%의 한글語'이다. 한자어에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개념어를 비롯한 명사가 많다. 國家, 民主主義, 市場, 電力 같은 단어들이다. 한글語는 '바람, 눈물, 덥다, 좋다' 따위의 자연현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원초적 의미語가 많다.
漢字語를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발음부호를 붙이는 것인데 의미전달에 지장을 줄 때가 많다. 同音異義語가 많기 때문이다. '전력이 줄었다'고 할 때 그 '전력'이 電力인지 戰力인지는 앞뒤를 맞춰보아야 알 수 있다. '부상했다'고 써놓으면 '다쳤다'는 뜻인지 '떠올랐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앞뒤를 연결시켜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암호를 푸는 행위이지 독서가 아니다. 시간 낭비이다.
글의 1차적 목적이 정확한 의미전달이므로 漢字와 한글 혼용을 버리고 한글專用으로 가는 것은 한국어의 약70%를 암호로 만드는 母國語 파괴행위이다. 지금처럼 한글專用이 오래 간다면 한국어는 이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한국어=70%의 암호+30%의 본능語(감정+자연현상)'
언어는 인간의 思考를 지배한다고 한다. 암호와 본능이 뒤섞인 정신세계를 생각해보라. 안개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막연하고, 뜨거운 감정과 즉흥적인 본능이 분출하는 머리속! 맑은 논리와 깊은 성찰을 통해서만 우러나오는 창조와 예술이 이런 정신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한글專用은 인간을 一次元的인, 가볍고 천박한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선동에 잘 넘어간다. 한국 사회의 두 가지 흐름인 좌경화와 저질화의 바탕에는 漢字말살에 의한 理性의 실종사태가 있다.
한자를 모르면 우리나라 단어의 약70%, 그것도 고급의 개념과 思惟를 담고 있는 낱말의 뜻을 정확히 모르게 된다. 한자를 모르면 철학서, 역사서, 법률서적을 읽을 수 없다. 전통문화가 들어 있는 정보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가 없으면 뿌리 없는 인간이 된다. 이런 사람들이 쓰는 글도 가볍고 잘 흔들릴 것이다. 예컨대 한자를 모르면 이런 글도 쓸 수 없다.
< 경주박물관에 있는 新羅聖德大王神鐘은 별명이 奉德寺鐘이고 속칭은 에밀레종이다. 이 종에 새겨진 640여자의 頌詞(송사)가 있다. 그 가운데 '圓空神體'(원공신체)라는 말이 있다. 이 범종이 그냥 종이 아니라 그 형상이 둥글고 그 속이 비어 있으므로 바로 이것이 '神의 몸'이라는 뜻이다.
神의 속성을 圓空, 즉 둥글고 속이 빈 존재로 규정한 것이 참으로 의미 깊다. 원만하면서도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 에밀레종이고, 神의 모습이다. 神은 둥글둥글해서 누구와 싸우지 않으며 속이 텅 비어 있어 모든 것, 즉 갈등과 淸濁까지도 다 받아들여 하나의 질서로 융합한다. 에밀레종은 바로 그런 神의 소리인 것이다.>
한자를 멀리하고싶은 사람은 글을 아예 쓸 생각을 말아야 한다.
좋은 글은 主題가 선명하고 구체적이다. 그런 글은 읽고나면 가슴에 남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감동일 수도 있고 정보일 수도 있다. 관념적인 글보다는 事例와 사실이 많은 구체적인 글이 좋은 글이다. 적절한 통계와 사례가 글의 설득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글은 리듬과 흐름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물흐르듯 편하게 읽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나, 반면, 그런데 같은 말들이 문장 앞에 붙으면 글의 흐름이 끊어진다. 글을 써놓고 소리 내어 읽어가면서 고쳐보라.
'그는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을 딸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식 문장을 버리자. 이런 문장은 자신이 쓴 글을 자신이 강조하는 일종의 宣傳文이다. '그는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금메달을 따왔다'고 쓰면 되지 여기에 굳이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강제할 필요가 없다. 글은 담백한 마음으로 써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라, 저렇게 보라는 식으로 글의 의미를 강조, 독자들의 몫까지 빼앗아갈 필요가 없다. 한국인의 글은 대체로 설명과 강조가 지나치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정보와 좋은 문장과 교양 있는 낱말들이 入力될 때 名文이 자연스럽게 出力된다. 많은 入力은 결국 독서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名文과 名연설을 많이 읽자. 책상 위에 항상 국내외의 名言集을 두고 심심할 때 읽어보자. 좋은 글은 읽는 이들을 의식하고 계산하며 쓴 글이다. 글의 소비자를 무시하고 써대는 글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자기가 쓰고싶은 글보다 독자들이 읽고싶은 글을 쓰자. 좋은 글은 타이밍이다.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빨리 써야 많이 읽힌다. 널리, 빨리 읽히는 글이 대체로 좋은 글이다. 결국 아는 것만큼 쓸 수 있다. 많이, 정확히 알아야 잘 쓸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쓰려고 할 때 기교가 등장한다. 취재와 調査와 분석을 잘 하면 좋은 글은 의외로 쉽게, 빨리 쓰여진다.
2. 나는 글쓰기가 너무나 쉽다
머리에서 힘을 빼자.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글쓰기의 두려움도 없어진다.
*좋은 글쓰기의 일반 원리
1.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글쓰기의 두려움도 없어진다.
2. 名文보다는 ‘정확하고 쉬우며 짧은’ 문장이 더 좋다.
3. 修飾語(수식어)보다는 명사와 동사를 많이 써야.
4. 무엇을 쓸 것인가. 글의 主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5. 낱말의 중복을 최소화한다. 글도 경제적이라야 한다.
6. 모든 글은 30%를 줄일 수 있다. 압축해야 폭발력이 생긴다.
7. 글의 리듬(韻律)을 맞추자. 글을 써놓고 소리내어 읽어본다.
8. 漢子를 適所(적소)에 섞어 쓰면 읽기 쉽고 이해가 빠르다.
9. 긴 글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하고 흐름이 있어야 한다.
10. 語彙力(어휘력)은 독서의 축적이다.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11. ‘잘 쓰기’보다는 ‘많이 쓰기’이다.
12. 글의 원료는 語彙力과 자료와 생각이다.
13. 글은 즐겁게 써야 한다. 글은 말처럼 인간의 본능이다.
14. 名言, 名文, 名연설집, 그리고 사전류를 곁에 둔다.
*제목 달기
1. 제목은 내용의 요약이고, 미끼이며, 主題이다.
2. 제목은 글자수의 제한을 받는다.
3. 독자들이 읽을까말까를 결정하는 것은 제목을 통해서이다.
4. 제목은 필자가 다는 것이 원칙이나 편집자가 최종적인 권한이 있다.
5. 제목을 뽑는 것은 레이아웃(사진 그림 등) 및 기사비중 결정과 함께 잡지, 신문 편집의 3大 핵심 요소이다.
6. 제목을 보면 신문, 잡지, 기자들의 자질과 안목을 알 수 있다.
7. 제목의 내용이 기사의 등급을 결정한다.
8. 무슨 기사가 중요하고 무슨 기사가 덜 중요하느냐의 판단은 기자의 자기능력 평가이다. 뉴스밸류 감각이 좋은 기자가 특종을 많이 한다.
9. 제목과 跋文(발문·뽑음글)의 조화가 기사를 입체감 있게 만든다.
10. 제목은 詩이기도 하다.
*제목달기의 각론
가. 제목은 기사를 읽은 직후 그 느낌이 살아 있을 때 뽑아야 한다.
나. 제목은 우선 흥미유발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 과장해선 안되지만 평범해서도 안된다.
라. 새로운 사실을 부각시켜야 한다.
마. 제목은 구체적이거나 본질적이거나 상징적이다.
바. 단어의 중복이 없어야 한다. 기사도 중복은 허용되지 않는데 하물며 제목에서랴.
사. 말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KAL에 칼을 댄다’, ‘Future of Freedom’, ‘12·12사건이 녹음되었다’, ‘장군들의 밤’, ‘평양은 비가 내린다’, ‘북한은 달러위조, 남한은 논문위조’, ‘국제사기단을 편드는 정권사기단’.
아. 상징적인 낱말 하나가 가장 좋은 제목이 될 수 있다.
자: 大제목과 副제목과 小제목의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 제목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카: 제목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독자는 의외로 이해력과 추리력이 높다.
타: 造語(조어)를 만들어 유행시키는 것은 최고의 제목달기이다. ‘뉴 라이트’ ‘차떼기’ ‘퍼주기’ ‘연방제 事變(사변)’ 등은 국민들의 여론에도 영향을 준다.
3. 나쁜 문장
'김길동 총장은 000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임기 3년을 다 못채우며 중도하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위의 例文과 같은 기사문장이 자주 눈에 뜨인다. '....중도하차했다'고 하면 되지 왜 '중도하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고 토를 달아야 하는가. 먼저 따져볼 일이 있다.
중도하차하는 것이 불명예인가. 중도하차하는 것은 책임을 지는 일로서 명예로운 일일 수가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안타까운 일일 수가 있다. 중도하차를 불명예라고 해석하는 것은 기자일 뿐이다. 이는 私見이다. 보도문장에 이런 식의 私見을 넣으면 객관과 주관이 혼동된다. 기자는 불명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중도하차를 불명예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도하차란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해석을 기자가 한쪽 방향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변칙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중도하차에 대해서 왜 독자들이 불명예라고만 생각해야 하는가 말이다.
'중도하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는 기사문장에는 객관보도와 주관적인 논평이 혼재하고 있다. 이는 사실보도 문장과 논설문장을 섞어놓은 것이다. 기자가 私見을 보도문장에 섞어 독자들의 해석권을 침해하는 것은 일종의 독선이다. 이런 유형의 문장이 신문과 방송에 너무나 많다. 그런 기자들의 가슴속에는 다 독재자가 들어 있는 셈이다. 기자는 그냥 '중도하차했다'고만 쓰면 되는 것이다. 담백하게, 편하게. 불명예로 생각하든, 안타깝게 생각하든, 명예롭게 생각하든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4. 불필요한 설명의 例
<그는 인간적인 신의나 금전적 신용이 약한 사람은 동반자로서 함께 일할 만한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신의와 신용을 저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은 회사에 금전적인 손실을 끼칠 것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마저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의 例文은 이렇게 줄일 수 있다.
<그는 신의나 신용이 약한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정해두었다. 그런 이들은 회사에 금전적 손실을 끼치고 인화를 깨뜨릴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 信義'란 말에서 '인간적'은 필요 없는 낱말이다. 신의는 모두 인간관계의 현상이므로 인간적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금전적 신용'도 마찬가지이다. 앞에 信義란 말이 있으므로 신용은 자동적으로 금전적인 면을 가리킨다.
그 뒤의 문장은 전면 삭제해도 좋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기술했으므로. 신의와 신용이 없는 사람의 폐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제한된 지면안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는 경제활동이다. 문장을 경제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으면 중복된 문장, 불필요한 설명이 들어가 글이 늘어진다.
5. 한국인 문장의 한 惡習
편집장으로서 남이 쓴 글을 고치고 줄이고 하는 일을 오래 해왔다. 한국인들의 문장력은 國力에 비례하여 발전해왔다. 하지만 지식인층의 문장력은 한글專用을 무작정 추종하면서 오히려 정확성이나 품격에 있어선 못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교정을 보다가 보면 한국인의 문장습관 중 되풀이되는 惡習이 자주 발견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할 정도로 -하다'는 공식이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날 정도로 건강하다.>
<그는 출장을 도맡아다닐 정도로 주인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청백리라고 불릴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의 100대 인물로 꼽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문장에서는 '했다'로 잘라버려야 한다. 뒤의 '정도로 -하다'는 것은 중복이거나 쓸데없는 부연설명이다. 이런 악습의 심리가 재미 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라고 쓰면 되는데 여기에 의미부여를 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날 정도로 건강하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하나의 사례를 너무 확대해석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건강해서가 아니라 걱정이 많아서일 가능성도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일과 건강하다는 현상을 억지로 연결기키려는 방식이 '-할 정도로 하다'이다.
<김정일은 상해 시찰을 하면서 '천지개벽'이란 말을 했을 정도로 북한 체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위의 例文은 김정일이 천지개벽이라고 한 말을 바로 그의 개혁의지로 연결시키는 전형적인 과장과 일반화의 논법이다. '천지개벽이란 말을 했다'고 전달만 하면 될텐데 이 말을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해야 자신이 쓰는 글이 돋보인다고 강박관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문장법은 자기 과시형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이 이미 설정해놓은 논리의 틀에 사례를 그냥 끼워넣으려는 독재적 모습이기도 하다.
위의 例文 필자는 김정일이 개혁 마인드가 강하다는 점을 미리 전제해두고 '천지개벽' 발언을 그 논리 구조속에 끼워넣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이 천지개벽이라고 말했다고만 전달하면 독자들은 자신의 思考 틀속에서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그러지 않고 '-할 정도로 하다'라는 틀에 끼워넣어버리면 독자들은 필자가 제시한 해석에 끌려가든지 거부할 수밖에 없다. '-할 정도로 -하다'는 문장이 많이 쓰이지 않을 때 한국 사회가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사회로 성숙될 것이다.
6. 상투적 표현
<느닷없이 들이닥친 국세청 조사반은 장부를 압수하고 운운.>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되었다.>
<유능하면서도 깨끗한 정치인을 찾아내기란 한국의 현실에선 하늘의 별따기이다.>
'느닷없이' '순풍에 돛단듯이' '하늘의 별따기'란 용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드는 데는 좀 빠져주었으면 좋을 표현들이다. 이 말을 쓰는 사람이 누구 편이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폭로시켜주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필자가 중립적이고 공정한 입장에 서 있기를 원한다. 느닷없이 국세청이 들이닥쳤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국세청을 비판하고 피조사자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하늘의 별따기'란 단어를 사용한 사람은 한국 정치를 비하 내지 비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독자들은 필자의 모든 문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읽어갈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 편에 서서 이런 글을 썼는가, 이렇게 말이다. 그러면 필자와 독자 사이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독자는 글읽기를 중단한다. 의심한다는 것은 때로는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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