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일 광구들이 몰려 있는 미국 텍사스 미들랜드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입구에 걸린 입간판. ‘신(神)은 미들랜드를 축복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photo 블룸버그 |
미국은 세계 최대의 석유수입국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 나라가 어느 틈엔가 자국산 원유를 글로벌시장에 공급할 기세다. 한때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던 석유가는 최근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떨어진 상태다. 미국산 원유가 국제시장에 등장할 경우 이미 하한가라는 평가를 받는 시장이 한층 더 ‘험악’해질 수 있다. 미국은 왜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 원유 수출에 나서려는 것일까. 미국의 원유 수출이 갖는 정치·경제·외교적 의미는 무엇일까.
21세기 키워드는 셰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한때 미국은 원유수출국에 명단을 올렸던 나라다. 석유수입국이기는 하지만 미국 주변 국가에 원유를 팔아 정제시킨 후 재구입하는 식의 구도로 수익률을 높였다. 원유 수출이 완전중단된 것은 1975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이다. 1970년대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가 가장 큰 원인이다. 당시 미국의 원유 채굴능력은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유전개발이 한계에 달한 틈을 이용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강력한 카르텔을 만들어냈다. 미국은 당시 석유가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원유 수출을 법적으로 금지한다. 올해의 원유 수출 재개론은 이후 40년 만에 이뤄진 ‘특별한 사건’이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 72개국으로부터 하루 920만배럴의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2014년 기준) 러시아가 하루 동안 채굴하는 원유량과 맞먹는 규모로 미국 전체 석유 소비량의 44%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해 미국 내 소비 석유의 절반 정도는 수입산에 해당한다. 캐나다가 최대의 대미(對美) 석유 수출국으로 1일 330만배럴,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OPEC 전체가 324만배럴을 미국에 수출한다. 외신을 통해 알려지고 있듯이 미국의 OPEC에 대한 석유 의존도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40년 이전에 중동산 석유의 미국 수출이 제로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21세기 글로벌시장의 키워드는 셰일(Shale)이다. 진흙이 뭉쳐진 혈암(頁岩)으로 원유와 가스 추출이 가능한 퇴적암이다. 2010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셰일 에너지는 불과 5년 만에 전 세계 에너지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원유에 비해 2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채굴비 덕분에 에너지 가격 인하를 주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초(超)고압수를 활용한 ‘프랙킹(Fracking)’ 기술 덕분에 채굴비를 한층 더 낮췄다. 미국은 셰일 에너지를 가장 먼저 에너지시장에 확산시킨 나라다. 경기둔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발적인 셰일 열풍에 힘입어 석유가는 추락세로 접어든다. 세계 에너지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나아가 남미의 볼리비아 같은 나라들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한층 더 가열되는 미국의 셰일 개발 붐이다. 이는 에너지시장의 먹구름과 전혀 무관하다. 이유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엄청난 투자에 있다. 셰일 일확천금 기대에 힘입어 월스트리트발(發) 투자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에너지시장이 비상이라고 하지만 셰일 열풍은 거꾸로 광풍(狂風)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 논의 중인 원유 수출 문제는 바로 그 같은 셰일 광풍에 따른 결과물이다.
셰일 에너지가 대량 생산되면서 미국 내 석유가는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 28일 기준으로 미국 내 가솔린 가격은 1갤런당 평균 2.32달러이다. 1년 전 가격은 3.40달러다. 1년 만에 무려 30%나 내린 셈이다. 소비자들이 두 손을 들어 반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석유가 하락은 거시경제 차원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에너지 가격하락에 따른 경기위축 우려 때문이다. 비싼 에너지도 부담이 되지만 싼 에너지는 한층 더 큰 문제다. 결국 공급과잉에 따른 경기위축을 막기 위해 외국에 원유를 수출하면서 가격을 적당히 유지하자는 원유수출금지 해제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셰일 개발업자는 물론 텍사스주를 중심으로 한 석유업계의 목소리에 해당한다. 국제 원유시장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던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벗어나 시장 자체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에너지 가격을 능동적으로 창조해 나가자는 주장이다. 셰일 열풍이 일고 있는 미국 북서부 지방과 중부 텍사스 지방 출신의 정치가들이 적극 나서고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에너지 정치
정치적으로 볼 때 셰일 개발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구별짓게 만드는 분기점이다. 전통적으로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산업은 공화당의 이해에 직결된다. 41대와 43대의 부시 대통령 일가를 만들어낸 텍사스주는 공화당의 기반이자 홍위병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석유나 석탄과 같은 재래식 화석연료를 적대시한다. 환경문제가 가장 큰 이유다. 따라서 환경문제를 해결해 줄 그린에너지 분야가 민주당의 관심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원유수출금지 해제법은 애초부터 공화당의 생리에 맞는 분야다. 그러나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공화당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도 많다. 북서부와 중부의 셰일 에너지 개발에 나선 지역들 가운데 민주당의 기반이 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셰일 열풍에 따른 관련 산업의 활성화란 측면에서도 공화당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원과 상원에서의 통과가 예상되는 것은 그 같은 배경하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의회 내 활발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백악관이 법안 상정 반대의사를 나타내면서 의회 통과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백악관은 원유수출금지 해제 여부는 상무부가 관장해서 처리할 법이라고 말한다. 행정부의 소관인데 굳이 의회가 나서서 관련법을 제정하려 한다는 데 대해 부정적이다. 언뜻 들으면 원유수출금지 해제법에 반대하는 듯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원유수출금지 해제 그 자체가 아니라 해제 주도권 여부에 대한 이견(異見)을 내놓았을 뿐이다. 현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원유수출금지 해제 자체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밝히지 않은 상태다. 미국산 원유 수출은 셰일 에너지 개발 붐 강화를 의미한다. 환경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린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중시 여기는 오바마 입장에서 재래식 화석연료업계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식화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석유 수출이 재개될 경우 수많은 고용창출과 관련 산업의 활성화가 이뤄질 수 있다. 환경주의자와 민주당의 생각에 반대할 수 없는 입장과, 돈과 일자리를 보장하는 블루칩 비즈니스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법안의 의회 통과 과정에서 민주당 정치인이 얼마나 많이 찬성할지 여부가 오바마의 지지를 끌어내는 변수가 될 것이다.
에너지는 산업혁명 이후 세계 역사를 메워온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양적·질적으로 풍부하고도 안정된 에너지 자산을 가진 나라만이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자국만이 아니라 이해를 함께하는 우방이나 동맹과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에너지다. 동맹 사이에 흐르는 피가 바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는 글로벌 패권과 무관하다. 1·2차 세계대전, 나아가 냉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에너지를 둘러싼 자원전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나선 것은 미국의 석유금수조치에 따른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1989년 구(舊)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블록의 와해도 권역 내 석유 조달이 어려워진 데 따른 것이다. 21세기 미국산 원유의 수출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심리적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특히 미국의 우방과 적을 가늠하는 잣대로서 원유 수출이 활용될 수 있을 전망이다.
“중국과 같은 나라에~”
에너지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가격만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안정성이 시장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중국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에너지 관련 투자를 엄청나게 한다고 하지만 안정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1년 뒤가 안 보인다.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은 최고 지도자나 정권이 바뀌면 기존의 약속을 백지로 돌리는 나라다. 장기적 관점의 안정적인 공급과 무관한 곳이 아프리카와 남미다. 이슬람 테러리즘이 글로벌 이슈로 등장하면서 최근에는 중동석유의 공급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미국은 다른 에너지시장에 비해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공급 라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미국산 에너지를 원하는 나라가 많을 것이다. 미국산 원유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폭증할 수밖에 없다.
사실 미국은 이미 석유 수출에 나선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8월 멕시코에 대한 경질유(輕質油) 수출 허락이 그것이다. 오바마는 멕시코산 중질유(重質油)를 수입하는 대신 하루 10만배럴의 경질유 수출을 허용했다. 경질유 수출은 이미 캐나다에도 시행되고 있다.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한 수출은 정제 과정을 거친 경질유다. 당시 백악관은 유전에서 막 퍼올린 원유가 아닌 정제된 기름이란 점을 강조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기름을 수출한다는 의미다.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한 경질유 수출은 앞으로 닥칠 미국산 원유 수출의 의미를 가늠할 좋은 본보기이다. 경제적 차원만이 아닌 안보외교 차원의 원유 수출이다. 멕시코와 캐나다는 미국의 앞뒤 마당에 해당한다. 국경을 접한 두 나라에 대한 특별대우가 경질유 수출이다. 원유 수출이 이뤄질 경우 비슷한 차원의 판매방식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이해관계에 있는 우방이 원유 수입 우선국이 된다는 말이다. 우방이란 말은 정치적·군사적 관계에서 해석될 수 있다.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는 미국산 원유 수입의 1순위에 해당될 수 있다. 일본은 군사동맹만이 아니라 셰일 에너지 개발을 돕는 기술동맹이란 차원에서 한층 더 우대받을 것이다.
현재의 에너지 시장을 조망해 볼 때 가장 큰 핵심은 중국이 될 것이다. 경제불황과 함께 에너지 중독 현상이 다소 풀리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이 미국산 원유에 눈을 돌리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과연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미·중 간 관계증진 여부에 달려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중국에 미국산 원유를 수출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0월 5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 직후 성명에서 “중국과 같은 나라에 글로벌경제에 관한 룰을 쓰게 할 수 없다(We can’t let countries like China write the rules of the global economy)”고 강조했다. 에너지협력은 동맹관계의 핵심이다. 한국이 러시아산 석유를 전용파이프를 통해 수입한다는 것은 러시아와 준(準)동맹체제에 들어선다는 의미다. 미국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바마가 “중국과 같은 나라”에 동맹의 피를 수출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대신 중국에 이어 글로벌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도가 원유 수출의 주된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인도를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준동맹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원유수출금지 해제법은 다소 주춤해진 달러의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도 이끌어낼 수 있다. 원유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더 많은 달러 결제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아프리카와 남미의 석유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자국 통화인 위안화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원유 수출이 허용될 경우 과연 얼마나 많은 양의 수출이 이뤄질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셰일 열풍과 함께 해가 갈수록 수출량이 늘어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더불어 에너지시장에서의 달러 결제도 확산될 것이다. 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패권은 21세기에도 계속될 전망이다.